동영상/정지웅 요셉 신부님 강론 글입니다.

[스크랩] 2/4 연중 제5주일(나)

이웅수 2018. 2. 3. 22:06

         고통의 의미

오늘은 연중 제5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의 주제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늘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통, 남이 나에게 주는 고통,
신병으로 오는 고통,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오는 고통들입니다.
이런 모든 고통은 십자가에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욥기의 말씀입니다. 욥은 하느님과 모든 이웃들에게서 인정받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시험에 들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욥은 수난 받는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끝까지 하느님 사랑에 신뢰하며 이겨내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
부족한 사람, 나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처럼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가 위해서라면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애정으로 항상 찾아 나서십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이 그분 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병자나 죄인들,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도 당신을 찾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제임스 짐 스톡 테일이라는 사람은 미 해군 중장으로 월남전에서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8년간 모진 고생을 하고도 살아서 조국에 돌아와 한 때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처음에 고문 받던 3일 밤낮은 운동장 한가운데 손을 뒤로 묶고
무릎을 꿇게 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잠도 자지 못하게 하며 눈을 잠시라도 감으면
감시자가 모진 구타를 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3일 밤낮을 지내는 데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죽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어려운 절박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때 점심시간이 되어 다른 포로들이 지나가며 암호를 보내왔습니다.
‘툭툭 투두둑’ 발로 이 소리를 냈습니다. ‘툭툭 투두둑’이 암호의 뜻은 “하느님은 당신을 축복하신다.”
(May God bless you) 라는 뜻인데 나를 향해서 그들이 보내는 이 암호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감방에서 벽을 치며 이 리듬의 신호를 보냈고 마당을 쓸 때도 빗자루를 가지고
이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눈이 마주칠 때면 엄지를 들어 보이며‘ 당신이 최고야’라는 신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보는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고,
누군가와 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간증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이 고통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고통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고통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케 합니다.
고통은 사랑이 부족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의 일부이며,
구원사업을 위해 당하신 이 고통에 우리를 초대하는 것임을 바로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다른 모습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장클로드 피게의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고통 없이 사람의 마음이 비워지지 않는다.
비워지지 않는 마음에는 삶의 울림도 없다. 존재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했습니다.
한 사나이가 죽게 되었는데 죽으면서도 걱정을 했습니다. 나는 죄가 너무 마나서,
나는 천당 지옥은 믿지 않지만 지옥 갈 거야. 그러면서 죽었어요.
죽어 간 곳은 너무 고요하고 좋아서 여기가 천당이구나. 했어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왔지? 누구의 간섭도 없고 맛있는 음식도 지천이고, 지옥 갈 사람이 천당 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지내고 보니 따분하기 시작하더니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괴로워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하느님 저는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옥 체질이니 지옥에 보내주세요.”하고 소리를 지르니 천사가 말하기를 여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하더랍니다.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아무 사건도 없고 텅 빈 진공상태가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인생은 절대로 고역이 아닙니다. 불행의 대명사였던 고통은 이제 더 이상 불행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그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셨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도 새 세상을 여는 관문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의 부활로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살아가며 고통스럽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살아가며 내가 만나는 고통은 내가 사랑해야하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고통은 부활의 전주곡이며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늘 감사하고 늘 기뻐하는 삶은 고통의 의미를 바로 깨닫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서는 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교회 안의 형제자매가 나와 연결되어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 부부영신수련수원 MR
글쓴이 : 시노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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