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정지웅 요셉 신부님 강론 글입니다.

[스크랩] 8/8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이웅수 2018. 8. 7. 22:05

         “주님의 개”        

도미니코는 스페인의 오스마와 아란다데두에로의 중간에 있는 칼레루에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실로스의 도미니코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그는 희망을 가진 어머니들의 수호성인이다.
칼레루에가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올라가면 실로스의 도미니코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작센의 요르단이 쓴 기록에 의하면, 도미니코의 부모는 처음에는 아들의 이름을 도미니코로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도미니코가 태어나기 전에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상태였던 그의 어머니는 실로스로 순례를 갔는데, 어느 날 자신의 뱃속에서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온 세상이 불타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는 이 꿈을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말로써 세상을 불태우게 될 태몽으로 해석하였다고 한다.
도미니까니스(Dominicanis)라는 즉 “주님의 개”라는 별칭을 받게 되어 도미니코로 명명하게 됩니다.

도미니코는 팔렌시아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특히 미술과 신학을 공부하는데 각각 6년과 4년 동안 매진하였다.
1119년 스페인이 기근에 시달릴 때, 젊은 도미니코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옷과 가구 그리고 그가 소중히 여기던 필사본까지 팔아서 기부했다.
1194년 도미니코는 25세의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아,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준수하는 오스마 교구의 의전사제가 되었다.

1215년 도미니코는 툴루즈의 지주층인 페드로 세이라가 제공한 가옥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수도회를 세웠다.
그와 동료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이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채택하고,
성직 수도 참사회인 프레몽트레회의 관습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였다.
그동안 풀크 주교는 도미니코와 그의 동료들에게 툴루즈 지역을 순회하며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같은 해에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소집되자,
도미니코와 풀크 주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인가를 약속을 받았다.
인노첸시오 3세는 도미니코의 인품과 신앙 그리고 사도직 수행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살펴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도미니코는 다시 로마를 방문했으며, 마침내 1216년 12월 또는 1217년 1월에 새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 또는 ‘O.P.’, 도미니코회의 공식 명칭)라는 이름을 받고 공식적으로 인준 받았다.

도미니코회 수녀원의 초창기 회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훗날 시복되는 체칠리아 채사리니는 노년이 되었을 때,  도미니코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보통 키에 마른 사람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피부는 흰 편이었다. 그리고 붉은색이 감도는 머리카락과 수염, 아름다운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길고 고운 손을 지녔으며,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비록 그는 완전히 삭발을 했지만, 결코 대머리는 아니었고 몇 가닥의 흰 머리가 남아 있었다.”

도미니코 본인은 계속 여러 지역을 두로 돌아다니는 한편, 그의 수도회 수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그리고 도미니코가 로마에 세운 총본부를 통해 도미니코와 도미니코회원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나누었다.
1220년 초에 호노리오 3세 교황은 도미니코와 그의 동료 남자 수도자들을
고대 로마 성당 가운데 하나인 산타 사비나 성당에 초대하여 머무르도록 하였다.
그 전까지 도미니코회의 남자 수도자들은 로마의 산 시스토 베키오 성당의 부속 수도원을 임시 거처로 삼아 거주했는데, 이곳은 1218년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 여성 수도자들을 위한 수녀원으로 제공한 곳이었다.
산타 사비나 성당의 부속 수도원은 도미니코회의 첫 수도원 건물이자 여성 수도자를 위한 첫 수녀원 건물이다.
이미 1220년부터 수도자들이 살기 시작했지만, 1222년 6월 5일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도미니코회에 수녀원의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
산타 사비나 성당에 있던 수도회는 나중에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이전을 갔다.
16세기에 이곳은 성 토마스 대학원(라틴어: Collegium Divi Thomæ)으로 바뀌었다가, 20세기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립 대학교와 산티 도메니코 에 시스토 성당이 새로이 들어섰다.

1216년~1217년 겨울에 도미니코는 우골리노 데 콘티(훗날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집에서
처음으로 도미니코회 수사인 몽페라의 윌리엄을 만났다. 두 사람은 나중에 절친한 벗이 되었다.

도미니코는 1218년 12월 21일 볼로냐에 당도하였다. 그가 거처한 곳은 마스카렐라 성당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인데,
이곳은 도미니코회 수사로서 훗날 시복되는 오를레앙의 레지날도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나 수도원은 사정상 인근 포도밭에 있는 산 니콜로 성당으로 옮기게 되었다.
도미니코도 이곳으로 장소를 옮겨 정착하였고, 도미니코회의 첫 번째 총회가 이곳에서 소집되었다.
도미니코는 이듬해인 1221년 8월 6일에 선종하였으며, 시신은 1233년에 소박한 석관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기로의 증언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금욕적인 생활과 노동으로 몸이 버티질 못해서 결국 51세의 나이에 선종했다고 한다.
귀로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열로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산 니콜로 성당 부속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도착했으며,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그를 들어 올려 삼베 위에 눕혔다고 한다.
도미니코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동료 수사들에게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하여라. 겸손하여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하고 권고하였다.
그는 1221년 8월 6일 정오에 선종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 이미 서유럽의 8관구에 60여 곳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500여 명의 수사들이 있었다. 1300년경에는 500여 곳의 수도원에 회원들이 1만 여명으로 증가하였다.
도미니코는 123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부부영신수련수원 MR
글쓴이 : 시노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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