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
‘바르나바’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갓난아이처럼
그의 어머니가 밥을 먹여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잠시도 그를 떠나 있지 못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애물단지’를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정작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애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왜 사람들이 애물단지로만 보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자신이 안고 사는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고 사는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은총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복음 나누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바가 너무 몸이 아파서 지난주에는 성당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는 미사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 바르나바와 함께만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입니다.
심리학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3일 후에 죽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라 했습니다.
학생들은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께 전화하고 애인이랑 여행 가고…….
아, 작년에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그러다 보면 사흘이 가겠지요.”
“음, 저라면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가고,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쓰겠습니다.”
학생들의 소망은 뜻밖에도 평범했습니다. ‘여행을 간다. 친구를 만난다.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교수님은 칠판에다 한마디를 썼습니다.
‘Do it now!’(지금 바로 하라!) 교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는다고 생각하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동영상 > 정지웅 요셉 신부님 강론 글입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3/5 사순 제1주일(가) (0) | 2017.03.04 |
|---|---|
| [스크랩] 3/4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0) | 2017.03.03 |
| [스크랩] 3/3 재의 수요일 다음 금요일 (0) | 2017.03.02 |
| [스크랩] 2/15 연중 제6주간 수요일 (0) | 2017.02.14 |
| [스크랩] 2/14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0) | 2017.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