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사랑의 시선으로
장애인이시지만 그 장애를 딛고 당당한 법조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하느님은 믿으시지만 성당은 나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분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백주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금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무엇에 눈이 멀면 그것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또 이런 고사도 있습니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않는다.”
인간의 눈은 이렇게 마음이 원하는 것만을 집중해서 보게 되고
그래서 전체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시선이 자신뿐만 아니라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언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가리켜 무엇에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백주대낮에 금을 훔치는 일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께 해를 끼칠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질문을 하지만 그들은 그 질문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든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서 안식을 법을 어기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금도 아니고, 사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따듯한 시선으로 당당히 사람들 가운데 나설 수 있게 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느냐며
“괜찮다, 괜찮아!”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눈빛이 바로 예수님의 눈빛이었습니다.
움츠린 사람을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서게 하는 그 눈빛, 우리에겐 그런 눈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에겐 두 가지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이는 시선과 살리는 시선, 오그라들게 하는 시선과 펴게 하는 시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심판하는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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